고등학생 빌리는 버펄로 빌스의 광팬이 되어버린 어머니와 집안 여기저기에 가득한 버펄로 빌스 로고 상품들 때문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거실에 놓인 칙칙한 티브이 화면 앞에서 1966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 결승전을 크게 틀어놓고 버펄로 빌스를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모습을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는 학교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자신과 같이 눈에 띄지 않는 소수의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다. 록키도 그런 친구들 중 하나였다.
빌리와 록키는 10학년이었고 당시 록키는 아직 딸쟁이라고 불리기 전이었다. 찬란한 그 별명은 2년 뒤, 그러니까 록키가 12학년 때 여자 화장실에서 자위행위를 하다 발각돼 정학 처분을 받으면서 수여된다. 록키가 정학 기간 동안 심리상담 치료를 마치고 등교했을 때, 누군가 그의 사물함 손잡이에 요구르트가 가득한 콘돔을 매달아두었다. 사물함을 열어보니 문 안쪽에는 검은색 래커로 ‘역겨운 딸쟁이’라고 크게 쓰여있었다. 록키는 그날 이후 다시는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홀로 록키를 키우던 아픈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록키라고 불리지 못했다. 빌리조차도 그를 딸쟁이라고 불렀다.
록키는 뚱뚱한데다 지능이 약간 낮았고 말도 느렸다. 선생들은 수업을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그를 대놓고 무시했고 짓궂은 학생들 몇몇이 틈만 나면 그를 괴롭혔다. 빌리가 그의 유일한 학교 친구였다. 하지만 록키는 자위행위를 너무 많이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착한 학생이었다. 그는 길바닥에 작은 쓰레기조차 버리지 않았고, 공원에 매일 찾아가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곤 했다. 빌리는 그와 공원에 가면 비둘기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의 어깨나 정수리에 거리낌 없이 앉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록키는 그 시절 유일하게 빌리가 자기 집으로 데려갔던 친구였다.
빌리는 고등학교 때 단 한 번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학교 복도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마주쳤던 순간을 절대 잊지 못했다. 쉬는 시간 학생들로 가득 찬 복도에서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그가 있는 쪽으로 똑바로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때 그의 시야에는 그녀만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는데 사방이 회색으로 살짝 초점이 엇나간 듯 온통 흐린 와중에 오직 그녀만이 선명한 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쉬는 시간 복도를 가득 채운 시끌벅적한 소음이 일순간 소거되면서 적막해졌다. 공기와 소리가 사라진 공간의 기압 차이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소리 없는 공간을 그녀와 그녀 친구들이 마치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는 우주비행사처럼 천천히 빌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어두운 우주공간 속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돌고 있던 빌리의 곁을, 마치 눈부시게 빛나는 거대하고 무심한 혜성처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스침으로 빌리는 그녀의 중력에 이끌려 자신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렸다. 그는 탈선한 기차처럼 무한한 암흑 속으로 방향을 잃은 채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암세포처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빌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고, 서서히 그의 사춘기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이름은 웬디 발삼이었다. 빌리와 같은 학년이었고 버펄로의 부자 동네인 윌리엄스빌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그녀는 이미 학교에서 예쁘기로 유명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녀와 자신의 위치로 인한 낙차 때문에 현기증과 절망감을 느끼곤 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평화롭던 그의 학교생활은 하루하루 지옥으로 변해갔다. 그의 사춘기에 돋아난 사랑이라는 암세포는 지독한 집요함으로 빌리의 생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공부도, 친구들과의 만남도, 그가 유일한 재능을 보이던 볼링마저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는 웬디 말고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때 당시를 되돌아 보면 웬디의 모습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사건이 없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잘 시간이 되면 방에 들어가 아침에 나왔고 학교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영혼은 항상 웬디에게 가 있었다. 당시 빌리는 빈 껍데기였다.
빌리의 사랑이 다음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그는 비어버린 자신을 열등감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우울하고 칙칙한 그의 동네에서 비싸고 깨끗한 저택이 줄지어 있는 그녀의 동네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는 언제나 잘생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수많은 여자아이를 시종처럼 거느리는 예쁜 부잣집 딸 웬디와 보잘것없는 자신과의 거리는 과연 걸어서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열등감으로 무기력한 그가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학교에서 우연인 듯 그녀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몰래 그녀의 뒤를 따라가 본다거나, 평소라면 절대 갈 일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녀의 동네에 가서 혹시라도 그녀와 마주치게 될 까바 마음 졸이며 그녀의 집 주변을 배회하는 게 전부였다. 웬디와 그녀의 친구들이 빌리의 그러한 행동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빌리는 그녀의 동네를 배회할 때마다 만일 그녀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는 척을 해야 할지, 혹은 이 동네에 온 이유를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같은 생각에 무척 긴장하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실제로 그녀와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웬디의 집은 커다란 정원에 분수가 있는 하얀색 2층 저택이었다. 그녀의 방은 2층 왼쪽 끝 방이었다. 그녀의 집 앞을 지날 때 가끔 그녀의 방 창문이 열려있어 그녀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종종 웬디가 그녀 집 주위를 몇 번이고 뱅뱅 돌고 있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시 빌리는 학교 볼링팀의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연말 뉴욕주 학교 대항 볼링대회 출전을 위해 훈련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웬디의 흔적을 쫓으며 절망의 바닷속을 허우적대느라 훈련을 꽤 오랫동안 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코치가 그를 찾아와 훈련에 계속 나오지 않는다면 다른 학생을 대표로 선발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빌리는 볼링대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의 빌리는 짝사랑과 열등감에 완전히 잠식되어, 학교를 마치면 웬디의 집 앞에서 그녀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걸 매일 몰래 지켜보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그녀가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나면, 오늘도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뒤돌아서 집을 향해 한 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 돌아가곤 했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저녁, 그날도 빌리는 웬디의 집 건너편 골목에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산이 없어 골목 주택 담장의 좁은 물받침 아래에서 간신히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녀가 늦게까지 오지 않아 그는 꽤 늦은 밤까지 기다려야 했다. 혹시 그녀가 자기가 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 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며 지쳐 갈 무렵, 저 멀리 자동차 한 대가 비 오는 도로를 따라 웬디의 집 쪽으로 다가왔고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빌리는 시동을 켜둔 채로 그녀의 집 앞에 서 있는 자동차 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30분쯤 지났을까, 운전석 문이 열리고 키가 훤칠하고 잘 차려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트렁크를 열어 우산을 꺼낸 뒤 조수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조수석에서 내리는 여자에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웬디였다. 둘은 우산 아래에서 잠시 포옹을 한 뒤 키스를 나눴다. 남자는 그녀를 집 대문까지 바래다준 뒤 우산을 건네주고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자동차를 몰고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떠났다. 빌리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 남자의 자동차가 떠나버린 후에도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방 창문을 계속 바라보았다. 얼마 뒤 그녀 방 창문에 불이 켜졌다. 잠시 불이 켜진 웬디의 방 창문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비 오는 길 옆으로 늘어선 윌리엄스빌 저택의 창문들은 따듯한 불빛들로 빛나고 있었다. 차가운 비가 그의 몸 구석구석으로 차갑게 파고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비는 그의 속옷까지 파고들었다. 집에 도착해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현관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티브이를 보며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버펄로 빌스! 가자! 오 하나님, 이 바보 같은 자식, 잭! 빨리 좀 뛰라고!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빌리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몇 번인가 딸쟁이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어머니가 전해주었지만, 나중에 내가 걸게,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물론 딸쟁이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그는 온종일 자신의 방에 누워 아버지의 테이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 그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요.
당신과 같이 있을 때야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한다는 것을
그러니 당신, 마음을 열어 이 바보를 받아주오….”
일주일이 지난 어느 토요일 늦은 저녁, 빌리는 볼링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 볼링 연습을 좀 하려구요. 볼링장 키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날 밤 빌리는 아무도 없는 토요일 밤의 어두운 교정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학교 볼링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텅 비고 어두운 볼링장 벽을 더듬어 전원스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조명 스위치를 올려 레인 하나에만 조명을 켰다. 순간 어두운 볼링장 안이 윙윙대는 낮은 전자기 소음으로 가득 차며 한가운데로 몇 개의 빛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빛줄기들 아래로 긴 레인 하나가 빌리의 눈앞에 드러났다. 주말을 맞아 깨끗이 닦인 레인이 영광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곧이어 핀 세터가 자다 깨어 불쾌한 듯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레인의 끝에 열 개의 핀을 세웠다. 그는 레인으로 다가가 볼링공을 집어 들었다. 볼링공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고 킹핀을 노리며 곧바로 스텝을 밟았다. 그는 힘차게 공을 레인으로 던졌다. 공은 큰 소리로 비어있는 볼링장을 채우며 레인을 타고 핀을 향해 굴러갔다. 스트라이크. 빌리는 점수 기록도 하지 않은 채 바로 다음 볼링공을 들어 올려 다시 한번 킹핀을 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또 한 번 더. 그는 그렇게 던지고 계속 던졌다. 스트라이크, 스페어, 오픈 프레임, 거터볼, 거터볼, 거터볼, 스플릿, 스트라이크…. 핀 세터가 몇 번이고 계속 핀을 세웠다. 서서히 빌리의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아프다가 어느 순간 점점 마비되어 감각이 사라져 갔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거터볼, 스트라이크. 그렇게 계속 기계처럼 볼링공을 레인으로 던져 넣던 그가 스플릿을 향해 볼링공을 던지려던 순간 스텝이 엉키며 레인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는 그대로 레인 위로 자빠졌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볼링공이 큰 소리를 내며 레인 위로 떨어졌고 몇 번인가 다시 튀어 오르고는 거터로 빠져 굴러가 버렸다. 공이 레인의 끝에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는 엎어진 채 그대로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잠에서 깬 핀 세터가 낡은 핀을 거두어가고 다시 새로운 핀들을 세웠다. 넌 날 이길 수 없을 거야. 이 당당하게 선 열 개의 핀을 보렴. 네가 아무리 공을 던져도 나는 이 열 개의 핀으로 네 앞을 가로막을 거란다. 영광스러운 빛 속에서 차가운 레인에 엎드린 빌리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빌리가 한참을 그대로 누워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때 빌리를 봤다면 볼링공으로 살해당한 시체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해 겨울, 빌리는 뉴욕주 학교 대항 볼링대회에서 전 경기 스트라이크를 기록했다.
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