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일라가 보육원을 나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광고 촬영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그녀는 세상이라는 타석에 들어서서 세상이 그녀에게 던지는 공에 맞서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가난의 불편함이나 육체의 피로는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배트는 오랜 보육원 생활로 다져진 검소한 생활 습관과 젊음의 패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녀는 닥쳐오는 일 대부분을 자신의 배트를 휘둘러 외야로 넘기곤 했다. 물론 어떤 때는 파울도 있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그녀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당시 그녀를 괴롭히는 건 파울이나 삼진 아웃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 타인이라는 관중들이 던지는 불편함이라는 야유였다. 세상에는 한 번도 타석에 서 보지도, 설 의지도 없으면서 안전하게 관중석에 앉아 야유하고 심지어 자신이 마시던 물병이나 맥주캔을 경기장 안으로 집어 던지는 인간들이 많았다.
자기 집 우편함에서 작은 봉투에 쌓인 몇 개의 사탕을 처음 발견했을 때, 레일라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떤 아이가 실수로 넣어둔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매번 다른 사탕이 담긴 똑같은 봉투가 일주일 내내 그녀의 우편함에 놓여있자 그녀는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봉투의 겉면에는 보내는 사람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사탕이 거슬리기 시작한 건 그녀가 일하는 식당과 카페에도 같은 봉투에 담긴 사탕이 놓여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것도 그녀가 출근하기 직전에.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분명한 건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 사람은 그녀의 집과 직장을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우편함에서 처음 사탕을 발견하고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긴 겨울의 끝을 알리는 따듯한 햇살이 가득한 화창한 봄날이었고 마침 휴일 오전이었던 탓에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는 다른 날 보다 손님이 많았다. 레일라는 출근하자마자 정신없이 주문을 받거나 차와 음식을 나르느라 종종걸음으로 테이블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던 어떤 남자가 바쁜 그녀에게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그녀는 그의 얼굴을 돌아봤지만,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일하다가 예전에 본 손님들이 아는 척을 해오곤 하기 때문에 그녀는 별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네, 오셨네요. 하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그 남자의 빨간색 안경테가 눈에 들어왔다. 안경테가 눈에 익었지만, 그녀는 곧 다시 분주히 카페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레일라는 불현듯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얼마 전 광고 촬영 때 본 남자였다. 최근에 문을 연 서부 시대 콘셉트의 펍에서 지역신문에 실릴 광고 사진을 찍던 때였다. 그때 그녀는 바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짧은 데님 핫팬츠와 배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있었다. 목에는 빨간 스카프가 매여있었고 손에는 권총 모형을 들고 있었다. 그 남자는 촬영을 의뢰한 펍에서 일하던 보조 바텐더였다. 그녀는 그가 당시 사장을 대신해서 촬영 현장에 와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아직 모델 일이 서툰데다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민망해서 레일라는 촬영기사의 요구하는 자세와 표정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다른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마 그때 그와 인사하고 명함을 주고받았을 테지만 명함을 어딘가 넣어둔 채 꺼내 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는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체격이었다. 그에 비해 머리통이 커다랬고 얼굴은 넓적해서 전체적으로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은 아니었다. 특히나 눈이 굉장히 음침했는데, 그런 자신의 눈빛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빨간 안경테를 쓰고 있었다. 방금 그 남자가 그녀에게 인사했을 때 눈에 띈 빨간 안경테 덕분에 그녀는 늦게나마 그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레일라는 그가 단지 외모적으로 비호감이어서 맘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는 촬영장에서도 그녀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특히 레일라는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금도 일하다가 그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 남자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의 가슴을 지긋이 보고 있다가 급하게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몇 번이고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가 주문받은 커피를 나르려고 어쩔 수 없이 그 남자 근처를 다시 지나쳐야만 했는데 그때 그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레일라, 잠시만요.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바쁜 와중이어서 곤란했다. 그리고 그의 음흉한 눈빛 때문에 별로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남의 시선에 꽤 익숙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 남자의 기분 나쁜 눈빛은 그녀로 하여금 발가벗겨진 느낌을 받게 했다. 게다가 여긴 그녀의 직장이 아닌가. 바쁘다는 걸 뻔히 보고 있음에도 무례하게 자신의 용건만을 내세우는 사람을 레일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색 없이 웃으며 그를 향해 잠시 멈춰 서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잠깐이면 돼요. 자, 이쪽으로.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옆 의자에 억지로 끌어 앉혔다. 그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자 그는 빨간 안경테 안쪽의 눈으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짧고 굵은 손가락들이 달린 양 손바닥을 몇 번 비비더니 양손으로 초조한 듯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녀를(그녀의 가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고 웨스트 펍의 채드입니다. 그날 촬영장에서 인사했었죠, 우리.
네, 기억나네요. 그런데 제가 근무 중에는 손님들 테이블에 앉으면 안 되고요, 보시다시피 무척 바빠서요.
그녀는 그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과 그가 그녀를 억지로 앉힌 것에 조금 화가 났지만 간단하게 아는 척을 해주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벗어날 요량이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가 다급하게 그녀 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럼 레일라, 오늘 세 시에 끝나시죠? 긴히 할 말이 있어요.
그는 무거운 추라도 달린 것처럼 자꾸만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내려가는 자기 눈동자를 간신히 그녀의 얼굴 쪽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얘기요? 제가 오늘은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요.
레일라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채드는 집요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그녀를 따라 일어나 교묘하게 그녀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서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 펍의 전속모델로 채용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여기처럼 바쁘고 주급도 적은 곳보다 아예 우리 펍에서 일하는 건 어떤지 해서요. 제가 사장님께 말만 잘하면 바로 채용될 수 있을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 식사라도 하면서 당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해 봐요.
그녀는 그가 말을 하면서 그녀의 팔을 여전히 세게 쥐고 있고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어서 그가 하는 말이 모두 뻔뻔하고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그가 남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의 시선은 이제 거의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는 듯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곳 바로 옆 테이블에는 덥수룩한 장발의 깡마른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버펄로 빌스 야구모자를 쓰고 버펄로 빌스 점퍼를 걸치고 혼자 앉아있었는데 그녀와 채드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다 들릴 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그의 테이블 위에는 볼링공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둥근 가방과 트로피가 놓여있었다. 트로피 꼭대기에는 볼링핀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고 하단에는 두 개의 볼링공 장식이 붙어있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좆같이 생긴 트로피였다. 그 트로피에는 황금색으로 ABC(미국 아마추어 볼링 협회) 로고와 제32회 뉴욕주 성인부 챔피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봐요, 아가씨. 도대체 나는 언제쯤 주문을 할 수 있을까?
그 남자는 팔을 잡힌 채 곤란해하는 레일라를 향해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순간 대화를 멈추고 소리를 지른 남자 쪽을 돌아봤다. 레일라에게 추근대던 채드조차도. 그 남자는 레일라가 아니라 채드와 채드가 잡고있는 그녀의 팔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채드가 당황하는 사이 레일라는 그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잡혔던 팔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채드를 잠시 노려본 뒤 소리를 질러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다가갔다. 채드는 얼굴을 붉히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그녀가 등을 돌리고 가버린 터라 당황하며, 그녀의 등에다 대고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 봐요 레일라, 그동안 제가 보낸 건 잘 받으셨죠? 곧 당신 집에서 당신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그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채드로 인한 분함과 서글픔을 억누른 채 자신을 도와준 남자에게 커피 주문을 겨우 받아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으며 놀란 그녀를 달래주는 바람에 그녀는 거의 울뻔했다. 주방에서 마음을 다스리던 그녀는 그 남자에게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녀는 주방에서 나가기 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연습해 온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지어보았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수녀님이 자주 해주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란다. 레일라,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야. 잠시 후 주방을 나온 레일라는 남자에게 커피를 들고 다가갔다.
천만에요.
그가 먼저 말했다. 그 말은 레일라의 얼굴에서 꾸며진 미소를 지우고 진짜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커피가 너무 늦었네요. 아시다시피 중간에 사고가 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어요.
그녀는 커피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오, 굉장한 커피네요.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그는 옅은 푸른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운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뭐,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나는 꽤 좋은 일이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트로피를 곁눈으로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말을 할수록 그녀는 피로와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볼링을 아주 잘 치시나 봐요.
뭐 그럭저럭.
저도 한번 배워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잘 치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
비결이라…. 글쎄요.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커피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끔 게임이 더럽게 안 풀릴 때가 있거든요. 핀들이 살아 움직여 내가 던진 공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좆같이 안 맞을 때 가. 하지만 중요한 건 게임에서 스트라이크를 많이 기록하는 게 아니라…. 스페어일 때 흔들리지 않는 자세 같아요. 스트라이크는 단지 행운일 뿐이고 스페어를 처리하는 게 진짜 내 실력이라고 여기는 거.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정도 같군요….
말을 마친 그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3년 연속 ABC 뉴욕 챔피언이 말하는 거니까 아마 맞을 겁니다.
그는 테이블에 커피값과 꽤 많은 팁을 올려놓은 뒤, 볼링공 가방과 트로피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 문으로 향했다. 그는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나 같으면 이사 갑니다. 저런 놈은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거든요.
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돌려 카페를 나갔다.
레일라는 그의 목소리와 그가 해준 말들과 그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의 가슴이 아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그녀가 보기에 꽤 잘생긴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끔 그때 연락처라도 받아 둘걸, 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