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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

버펄로 '96_11. 빌리 브라운

  출소일 아침이 밝았다. 잿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지표면에 눌어붙은 듯한 날씨였다. 간밤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교도소 주변 들판을 훑는 강풍과 만나 세찬 눈보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빌리는 창문 틈에서 나는 빠진 치아 사이를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다. 아침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세상이 온통 새하얗다. 아니, 하얗다기보다는 칙칙한 회색이었다. 회색 풍경 위로 회색 눈보라가 옆으로 눕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교도관들이 두꺼운 패딩과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풍경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군.

  그는 오전에 몇 가지 서류 작성을 마치고 교도소장과 간단한 면담을 위해 소장실로 향했다. 소장과 빌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지옥에서 나가게 된 걸 축하하네 빌리. 

  소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혹시 자네가 잊었을까 봐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알다시피 밖은 더 지옥이라네, 오늘 같은 날씨는 더더욱 그렇지. 

  소장은 두꺼운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어이쿠 까먹을 뻔했는데, 이거 감사합니다. 

  빌리 역시 말투와는 달리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는 오늘 출소한다는 사실이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창밖에는 소장의 말처럼 살짝 열린 지옥의 입구로부터 불어오는 듯한 눈보라가 가득했다. 소장은 커피잔을 든 채 창밖을 보며 한 마디 더했다. 

  다시는 들어올 생각 말게나. 

  빌리는 소장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보이는 눈 쌓인 감시탑 지붕을 바라보았다. 감시탑 꼭대기에 수북이 쌓인 눈이 커다란 케이크 같았다.

  아무렴요.

  빌리는 출소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자신의 방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점심은 입맛이 없어서 물만 마셨다. 방에 멍하게 앉아있다가 호출을 받았다. 교도관을 따라 물품보관소로 이동하여 이곳에 들어올 때 반납한 옷가지와 소지품과 현금을 받았다. 그는 자신과 달리 5년간 변하지 않고 그를 기다려 온 옷가지를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재질의 빨간색 첼시 부츠, 통이 좁은 회색 면바지, 가로로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가 그어진 소매 없는 티셔츠와 몸에 달라붙는 슬림한 면 셔츠 재킷. 옷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입을만해 보였다. 물품보관소에서 옷과 소지품을 받아든 빌리는 출소자 대기소로 이동했다. 대기소로 이동하는 복도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냉기가 가득했다. 소지품 상자를 들고 가는 손이 시렸다. 그는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자 그제야 이 옷들이 지금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을 받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지난 5년간 입고 나갈 옷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대기소에 도착해 추위에 온몸을 떨며 옷을 갈아입었다. 5년 만에 주인을 만난 옷들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갈아입고 나니 옷이 더욱 얇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줌이 마려웠다. 빌리는 가지가지 하는 군, 이라고 생각했다. 출소자 대기소가 처음인 그는 화장실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그를 안내해 준 교도관이 어디론가 사라져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귀찮으니 조금만 참자. 곧  나갈 테니 나가서 시원하게 눠버리자, 라고 생각하며 추위와 방광의 아우성에 잔뜩 몸을 쭈그린 채 대기소에 앉아 다리를 떨며 출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