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주님이 땅 위에 오신다면, 이곳과 같은 땅에 내려오신다면 말이야... 당신 어깨에 무엇을 메고 오실 것 같은가? 십자가? 아니야, 그건 석유통이네.”
아니타는 책을 한 손에 들고 읽으며 자신의 개인실 바로 옆 크리스티나가 있는 개인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크리스티나는 휠체어에 앉아 창가 옆에서 어두운 밤의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왔니?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 크리스티나가 아니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냐 크리스티나. 예수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다.”
“그래 그 책이구나. 석유통이라니, 요즘이라면 수류탄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고 창문을 있는 대로 몽땅 열어젖혀 둔 차를 모는 젊은 애송이들을 보고있자면, 오 예수여... 수류탄도 자비롭나이다.” 크리스티나는 휠체어를 돌려 아니타를 보며 말한다.
“혹시 자나 했어, 방금 그 차 지나가는 소리에 깬거야.?” 아니타는 기분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응... 아니 넌 내가 잘까봐 궁금했다는 애가 문을 열기도 전에 책을 읽으면서 들어오니? 요즘은 도저히 중간에 잠을 설치면 영 다시 잠들기가 힘들구나.”
아니타는 방안을 둘러보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언니의 카디건을 주워 선반에 잘 개어 놓는다.
“직원이 정리를 꼼꼼하게 안 하네.” 크리스티나는 아니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말한다.
“괜찮아, 내가 하면 돼. 사실은 자기 전에 한번 둘러보려고 겸사겸사 들렀어. 바닥에 이런 거 있으면 휠체어로 이동하기 불편하잖아. 그렇다고 언니가 바닥에 있는 거 정리하기도 불편하고.”
“여기 들어오길 잘하지 않았니? 그 때 안 들어왔으면... 그러니까, 전에 살던 집이었다면 내가 이 모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엄청 불편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정리하는 아니타를 바라보며 크리스티나가 말한다.
“좋긴 해, 가끔 예전 집이 그립긴 하지만... 언니 말대로 불편했을 거야. 일단 현관 올라가는 계단 부터 경사로로 뜯어고쳐야 했겠지.”
“너도 그러니?... 나도 가끔 예전 집이 그리워. 예전 동네도. 심지어 매일 시끄럽던 토니네 집 렉스의 짖는 소리도 그리울 때가 있더구나. 그 놈의 강아지, 이제 엄청 컸겠지?”
“다 자랐겠지. 그래도 우리를 알아보긴 할거야. 개는 코로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니까. 언제 우리 시간내서 동네에 가보자. 동네 사람들이랑 인사도 나누고 말이지”
“그래 좋아, 벌써 여기 들어온 지도 3년이네. 그동안 안 가 봤으니 많이 변했겠지”
아니타는 예전 동네를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크리스틴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옛 집과 작고 평화로운 거리, 마주칠 때마다 서로 인사하던 친근한 얼굴들, 크리스틴과 함께 평생 일하던 직장이었던 집에서 차로 30여분 떨어진 시카고 공공도서관, 그리고 수십 년을 봐도 물리지 않는 도서관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
“도서관에도 좀 들르자. 케이시랑 마가렛이 여전히 일하는 지 궁금하고, 조앤이 이혼했는지도 궁금해. 여기에서 그동안 읽은 책들도 좀 가져가서 기부하고. 베수비오에서 밥도 먹고.” 아니타는 그리운 표정으로 말한다.
크리스티나는 마시던 차를 옆 테이블에 놓는다. 찻잔이 놓인 곳 옆에 크리스티나가 읽다만 셰익스피어가 읽던 페이지를 밑으로 하여 펼쳐진 채 뒤집어져 있었다.
“내일은 정기 진료날이지?” 크리스틴이 물었다.
“응, 이번에도 혈압이 높으면, 약을 먹어야 한대”
“그래... 그래도 너는 건강한거야, 나는 네 나이 10년 전부터 그놈의 약을 먹어왔으니”
“그래도 약 먹는게 좋은 건 아니잖아, 이젠 예전처럼 매일 산책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져서 걱정이야” 아니타가 말하며 침대에 앉았다.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타,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잖니. 지금도 마찬가지야. 건강이야 계속 나빠지겠지. 그래도 우린 적어도 혼자는 아니야. 그게 중요한 거야”
아니타는 살짝 미소짓는다. 곧 일어나 언니의 뒤에서 언니의 양 어깨에 양손을 살짝 올려두며 말한다. “맞아, 크리스티나. 적어도 우린 혼자는 아니지. 맥베스 읽고 있었어?”
아니타가 책 표지를 보며 말한다.
“응... 요즘 셰익스피어가 너무 좋아. 넌 너무 구닥다리 같다고 싫어하지만... 사실은 아까 읽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망할 차소리에(오 예수여, 용서를 바라나이다.) 깨서 다시 조금 읽고 있었어. 읽다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어디 보자..” 크리스티나는 테이블에서 독서용 돋보기안경과 책을 집어든다.
“여기 있다. 들어봐.” 크리스티나는 안경을 쓰고 읽는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아니타는 언니의 낭독이 끝났고도 한참을 어두운 창 밖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도로에 차 한 대가 지나간다. 밤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