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조금 우울하고, 자신감은 없어 보이지만 그 깊은 안쪽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이 있는. 소년은 한 소녀를 사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이 있고만 싶었고, 이야기가 꽤 잘 통하는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어느 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꼬박 새우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위해 눈을 감던 새벽, 소년은 아, 맞다, 이게 사랑인가 보다. 수많은 시와 노래에서 말하던 사랑이란 게 나에게 찾아왔나 보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소녀는 아름다웠다. 적어도 소년의 눈엔 그랬다. 소녀의 웃음소리, 말할 때 특유의 모양으로 움직이는 입술의 곡선,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버릇, 컵을 잡을 때의 손 모양, 걸음걸이, 머릿결과 색깔,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식, 소녀가 지나갈 때마다 공기에 실려 날아오는 장미 향기(소녀는 장미를 좋아했다.) 등등 소녀의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소년은 무장 해제되었다. 무방비의 소년은 소녀의 존재 자체가 감행하는 무자비한 폭격에 무기력하게 유린당했다. 소년은 이제 소녀가 감추고 있는 모든 은밀한 비밀을 오직 자신만이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소년은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을 소녀에게 밀고했다. 그리고 소년의 마음속에 소녀를 위한 방이 만들어졌다. 소녀는 늘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가보고 싶어 했다. 웬 불가리아? 장미가 유명하거든, 불가리아는. 소녀는 장미가 가득한 계절에 소피아로 꼭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면 소녀의 눈은 미래를 예감하는 눈빛으로 장미처럼 빛났다. 언젠가, 꼭 소피아에 가서 좋은 호텔을 잡고, 장미 꽃잎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어. 소년은 도대체 불가리아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고, 소피아란 지명도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그 소원을 자신이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런 나날들의 끝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소년과 소녀는 이별하게 된다. 둘은 헤어졌고, 영원할 것 같던 그 밤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일이 돼버렸다. 그 뒤의 이야기란 여기에 옮기기에는 너무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당신들과 나에게도 일어나는 평범한 시간들이 소년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몇 해 뒤 소년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고, 소녀 역시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흔한 이야기다.
시간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그렇게 못할 것만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소년은 소녀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못 할 줄 알았지, 어느 날 그는 옛날을 회상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통에 죽을 것만 같던 시간은 소년을 지나 저 멀리 흘러가 버렸고, 소년은 점차 자신의 삶에 젖어 들어갔다. 다만 하나의 天刑이 소년에게 후유증으로 남았다. 불감의 저주. 소년은 몇 번인가 다른 여자와 만나봤지만, 어떤 여자도 소년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소년은 어떤 여자의 소원도 이루어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소년의 마음속 소녀를 위해 마련했던 작은 방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그 방에는 여전히 장미 꽃잎으로 가득한 욕조가 있었다. 소녀와의 한 때는 그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았고 어떤 사람도 그 흉터를 알아보지 못했다. 꿈처럼 달콤한 여자도 몇 번인가 만났지만 결국 소녀에 대한 그리움만 더욱 깊어졌다. 몇해 후, 소녀가 누군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년은 잊고 있던 작은 소리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듣는다. 그것은 소년의 마음속에 있던, 소녀를 위한 작은 방의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였다. 소년은 자신의 인생은 명목적으로는 이어지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었다.
여기 한때 소년이었던 남자가 있다. 남자는 밤길을 산책하고 있다. 한겨울 늦은 밤의 산책. 사방은 고요하고, 간간이 저 멀리 다리 위를 지나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검은 공간을 반으로 가르며 지날 뿐이다. 얼음같이 투명한 밤공기가 달다. 구름 하나 없는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하다. 옛날, 그러니까 소녀와 이야기로 밤을 꼬박 지새우던 그날, 밤하늘이 꼭 저랬던 기억이 난다. 넋 놓고 보던 하늘에 별 하나가 점점 커진다. 착각인 줄 알았다. 인제 보니, 아니, 커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 콩알만 한 그 빛이 어? 어? 하는 사이에 접시만 해졌고, 이제 레코드판 정도의 크기가 되어 남자의 위에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남자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들고 빛의 원반을 바라본다. 원반 모양의 그 불빛의 한 가운데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남자의 바로 앞으로 떨어진다. 남자가 미처 도망갈 틈도 없이, 그 빛을 따라 어떤 ‘것’이 내려와 남자 앞의 그 빛기둥 속에서 남자를 바라본다. 외계인이다. 이게 외계인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외계인이란 말인가. 그것은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너를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너에게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려고 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라. 당신은 뭐죠?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이 별로 없다. 너희의 시간으로 1분 30초 후에 나는 올라갈 것이며, 우리를 만난 기억은 삭제될 것이다. 그러자 남자는 주저 없이 말한다. 호텔이 되고 싶어요. 아주 짧은 침묵과 동시에 그 것의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에 당혹스러움이 나타난다. 잘...못 들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호텔이요 호텔. 저는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있는 아담하고 아늑한 호텔이 되고 싶다구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 몸을 호텔로 만들어주세요. 제 두 다리는 기둥이, 제 두 팔은 베란다가, 제 몸통은 여러 칸의 객실로...다만 제 얼굴은 호텔의 가장 아름다운 객실 욕조의 창문이 되고 싶습니다. 창문에는 장미 두송이를 그려넣어 주세요. 그 장미 두송이가 제 눈입니다. 창 바로 옆에 사기로 된 하얀 욕조를 놓아주세요. 욕조에 받은 물에는 장미 꽃잎을 흩뿌려 주시고요. 저는 호텔이 되고 싶습니다… 호텔, 불가리아, 창문, 장미... 맞나? 그 것은 남자에게 다시 한번 확인한다. 네. 알았다. 갑자기 눈앞의 빛기둥과 함께 그 것은 원반으로 빨려 올라갔고 다시 사방은 어둠뿐이다. 원반은 휙 밤하늘 별들 사이로 사라진다. 남자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집으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햇살이 두 눈에 가득했다. 남자는 곧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자는 호텔이 되었다. 그의 장미 눈은 눈앞의 욕조를 바라보고 있다. 욕조에는 장미 꽃잎이 뿌려진 기분 좋은 온도의 깨끗한 온수가 차 있다. 이제 남자는 기다린다. 소녀가 호텔에 찾아오기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