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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

편견과 열반

  그건 편견이야.

  편견이 나쁜 것이라는 편견을 버려요. 편견은 좋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걸 단순하게 만들거든요.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네이버 사전). 정의대로, 우리는 편견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쓰곤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공정과 불공정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생각이든 깊게 할수록 공정과 불공정을 구분하는 좁고 희미한 선은 모호해지곤 한다.

​  우리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 짓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말이란 ‘혼합된 무정형의 덩어리’로 인식되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당신을, 다른 것들과 구분 짓기 위한 것이지 않나. 구분 짓기를 통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와 거리를 만들고 세상에 대한 개념의 구조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아간다. 개념의 구조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과 저것이 어떤 것인 가라기보다는 어떤 차이인가이다.

  구분 짓기라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구분을 짓기란 어느 정도는, 경계에 있는 것들에 무책임하다. 공정한가 아닌가, 맞는가 틀리는가, 같은가 다른가를 가르는 선의 모호함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인간이 인식하는 방법은 편견의 문법과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말들로 짜인 인간의 인식체계 자체가 이미 편견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다. 카테고리, 프레임 워크, 관점 등등 모든 것을 구분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들은 사실 편견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지 않나.

  삼라만상이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말을 통해야만 한다. 그렇게 기호라는 몸을 가지고 우리에게 태어난 말들은 몸을 가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짐승들처럼 아프고 고프고 춥고 죽는 불완전한 존재다. 불완전한 주제에  끊임없이 완전함을 지향한다.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인생이 슬프고 세상이 힘든 건, 그러니까 고통과 비극은 아마 그로부터 생겨난 것일 게다.

  ​그래서 말을 버리고 삼라만상을 받아들이는 것. 그걸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