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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나무사이그녀눈동자

사슴

  꿈에 사슴을 보았다.

  새벽이었고 산속이었다.  오랜 등반에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산을 오를 때 새소리가 함께했고,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서러운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기 정상이 눈앞에 있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곧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거기에 작고 하얀 구름이 한 조각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슴이었다. 사슴은 새벽빛을 받아 유난히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볼 때는 웃는 듯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긴 눈물자국이 서럽게 나 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사슴을 향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경계하는 듯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슴은 조금씩 다가와서는 손가락 끝의 냄새를 조심스레 맡았다. 사슴이 놀라지 않게 살짝 손을 뻗어 살살 이마께를 목덜미를 그리고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본다. 부드러운 털이 이슬에 젖어 기분 좋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 아래로 털과 피부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방비한 근육과 뼈와 숨과 박동이 느껴졌다. 아, 아름다운 짐승이여. 코는 흑단같이 까맣고, 눈이 커다랗고 맑게 반짝였다. 

  정상에서 다시 내려갔다. 사슴이 앞섰다. 가끔 사슴은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듯 나를 돌아봤다. 종종 내 눈앞에서 사라져 길 옆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나는 굳이 쫓지 않았다. 잠시 혼자 걷다 보면, 옆에서 길로 휙 뛰어들어와 다시 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곧 뒤를 돌아봤다. 거기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가끔은 오랜 시간 숲 속에 들어가 나타나지 않기도 있었다. 그럴 때면 괜스레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결국엔 내 앞에 나타나 앞섰다. 산을 내려갈수록 눈물자국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앉아 쉬었다. 물을 마시고 땀을 닦았다. 사슴이 앞서다가 뒤를 돌아봤다. 잠시 사슴은 내가 앉아서 쉬는 모습을 고개를 돌린 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내 심장의 박동과 숨소리만 남았다. 숲의 냄새가 코를 찔러 어지러웠다. 볼이 차가워졌다. 눈을 떠보니 사슴이 어느새 내 바로 옆으로 와 코를 볼에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손을 들어 목덜미와 몸을 쓰다듬었다. 살아있는 몸의 탄력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 털이 나지 않은 곳이 있었다. 흉터다. 꽤 깊은 상처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길을 걷다 종종 옆구리를 핥았던 기억이 났다. 그냥 아물었으면 털이 자라 덮었을 터인데, 계속 핥다 보니 흉터주위에 털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짐승에게 쫓기다 생겼을까. 상처를 매만져주니, 그때의 기억이 난 듯 길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고요한 산속에 사슴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제 해가 떠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쳤고, 그늘은 더욱 어두워졌다. 눈물자국은 그대로였다.

  계속 내려갔다. 사슴이 다시 앞장섰다. 내려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다. 평탄한 길이 꽤 오래 이어졌다. 자주 앉아서 쉬었다. 쉴 때마다 사슴은 내 냄새를 맡고 내 손길을 느끼기 위해 다가왔다. 산길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사슴은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산길의 초입에 다다랐다. 사슴이 멈춰 섰다. 내가 지나가길 기다리 듯. 나는 사슴을 지나쳐 갔다. 지나며 보니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사슴이 뒤에서 내 옷자락을 물고 당긴다. 숲 속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듯.  나는 너를 집에 데려갈 수 없구나. 너를 산에 두고 가야 하는구나.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산이다. 그 순간,


  눈을 뜨고 잠을 깼다. 길고 서러운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