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들은 쓰이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진은 이야기 같은 존재다. 발견되길 기다리는 이야기. 이야기(또는 진)는 알리시아에게 나타나기 전 총 세 번 발견 되지만 결국 끝까지 마무리되지 못한 채 알리시아 앞에 나타난다.
이야기의 원형은 사랑과 갈망에 관한 것이다. 성경의 솔로몬과 시바 여왕 이야기. 여기서 진은 시바를 사랑하고 갈망하다가 결국 그 갈망으로 인해 바다 속에서 2천 년의 세월을 병에 갇힌채 지낸다. 아무도 기억이 해 주지 않는 망각 속에서.
병에 갇힌 그를 다시 발견한 여인의 이름은 걸텐. 후궁들과 살던 천한 소녀다. 그녀는 황제 술레이만의 적장자 무스타파를 짝사랑하게 된다. 걸텐의 짝사랑과 갈망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진은 2천년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과거 시바에 대해 진의 갈망이 그러했듯이 걸텐의 사랑 역시 비극으로 끝난다. 그녀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영감은 가졌지만 그걸 다룰 재능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그를 발견한 사람은 형(무라드)을 왕으로 둔 왕의 동생 이브라힘의 뚱뚱한 애첩이다. 그러나 이번 발견의 주인공은 이 여인이 아니라 이브라힘의 형인 무라드 왕이다. 무라드는 어린시절부터 병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는 진의 기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무라드는 진의 기운에 끌려 진이 갇혀있는 궁전 한구석 계단에 다가가기까지 하지만 결국은 발견하지 못한다. 무라드가 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것은 오로지 이야기(또는 이야기꾼)뿐 이었다. 무라드는 걸텐과는 반대인 인물로 진이라는 이야기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는 재능은 있는 인물이었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고 만다.
영감과 재능이 상반된 두 인물에 의한 두 번의 실패 후 진은 제피르를 만나게 된다. 제피르는 천재 소녀이자 인간 이성의 상징과도 같은 소녀다. 진의 도움으로 책들을 병에 가두어 자신만의 ‘바벨의 도서관’을 만드는 그녀. 제피르는 탐욕스럽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빨아들인다. 그녀는 영감(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재능마저 겸비하였고 진은 그런 그녀에게 점점 사랑을 느낀다. 심지어 진은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마지막 소원을 말하려하는 제피르를 저지한다, 말하자면 3천여년에 가까운 망각의 시간을 끝내고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진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랑 역시 비극으로 끝난다. 그렇게 진의 너무 깊은 소유욕은 결국 사랑을 망치고 만다. 진은 다시 한번 병에 갇힌다.
진의 과거는 네 번째로 자신을 발견한 알리시아에게 진이 이야기하는 형태로 전해진다. 이때 제피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하는 진을 바라보면서 알리시아가 침을 삼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알리시아는 진을 보면서 갈망을 느낀다. 그녀는 영화 내내 고독 속에서 그러니까, 어린 시절 자신을 이해해주던 친구인 노트로 그려낸 소년을 떠나보내고 첫 남편과의 아이를 유산하고 첫 남편과의 이혼을 경험한 후 고독으로 침잠하여 이야기 연구에만 빠져든 인물이다. 그런 알리시아에게 진의 사랑이야기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자신의 고독과 진의 고독을 하나로 만들길 갈망하고 진의 헌신적 사랑을 갈망한다. 소원을 말하라는 진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알리시아는 소원 이야기가 가진 의미와 교훈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오히려 계속 거부해왔지만 이제 그녀의 첫 번째 소원은 정해진다.
이후 영화는 이 긴 사랑과 갈망과 고독과 기다림의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향한다. 알리시아는 진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실수했던 그리고 자신이 살아오며 실수했던 그 모든 지점을 직업상 또는 경험상 샅샅이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오히려 그를 소유하지 않기로 한다. 마치 진이 제피르를 사랑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것과 같이. 그러나 진의 제피르를 포기한 것이 그녀를 갖기 위해서 였다면, 알리시아의 포기는 자유, 즉 사랑에 수반되는 소유욕을 버리는 의미다.
어쩌면 그녀가 공원에서 펼친 3천년의 기다림이란 책은 그녀가 어린 시절 노트에 친구인 소년을 만들어냈듯이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친구로 진을 만들어낸 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내용은 사실 그 책에 그녀가 써내려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진의 이야기는 그녀의 자신의 인생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녀는 아이를 잃었고(걸텐) 사랑을 잃었으며(시바) 지식에 탐닉(제피르와 이야기에 탐닉하는 무라드)했으나 남는 것은 결국 긴 고독이었음을 어쩌면 중년이 되어서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진이 영국에서 거대한 전파망원경을 두고 ‘오래된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접시라고 표현하는 부분 같은 곳에서 좀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멋지지 않은가?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야기 혹은 문학적 감수성 같은 인간의 나약함을 안아주는 포근한 그 무언가를 가져보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란 소유가 아닌 자유라는 의미를 진과 제피르와 알리시아를 통해 보여주는 부분도 매우 멋지다.
너무 재밌게 봤다. 그래서 말이 길어진 것이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꼭그렇진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