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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그렇진않았지만

니콜라스 하이트너, 크루서블 그리고 Zeal & Ardor, Devil is Fine

크루서블은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비디오로 봤던 기억이 있다. 내용이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마녀사냥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말도 안되는 모함에 지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억울함과 분노와 자포자기의 극한에서 결국 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해버리며 유죄가 선언되던 장면 정도가 기억이 났는데, 특히 신을 부정하는 장면에서 억울함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 최근에 다시 듣게된 Zeal & Ardor의 앨범 'Devil is Fine'과 뭔가 연결된 느낌이 들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희곡)이다. 국내 번역제목은 '시련(민음사)'이다. 영화의 소재가 된 마녀재판은 '세일럼의 마녀재판'이라는 1692년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다.

일단 다시 본 영화에서 놀란 점은 굉장히 재미있고, 이야기가 주는 힘이 연극처럼 선명해서 작가의 의도가 크고 강하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힘이 있다고 말해야하나... 경탄하면서 봤다. 왜 이런 좋은 영화를 기억 못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신들린 연기. 나 이 양반 연기 잘한다는걸 그닥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진짜로 미친듯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특히, 교수형을 앞둔 새벽에 부인과 해변에서 대화를 나누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서명하는 장면의 절규하는 씬은 오래오래 내 맘에 남을 듯 하다.

악이라는 것이 자신만이 옳다는 태도에서 오는 독선과 오만함에서 온다는 점(실제로, 마을 여자아이들은 선의 편인 척 하기를 지속적으로 해대는데.. 정말 밉다), 그리고 거기에 함몰된 풍선 대가리같은 지도층의 자기합리화의 한심한 사고방식, 제 생각이란 없고 나약하여 남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마을사람들의 군중심리와 광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재판 과정은 그야말로 고구마 열개정도를 물 없이 목에 쑤셔 넘기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답답한데, 결국 존 프록터의 자포자기 하는 씬(내 기억에 남았던)이 나오는 그 부분, 즉 그 어떤 말로도 설득이 불가능한 인간들을 앞에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는 분노를 표현한 그 부분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명연기와 맞물려 보는 사람에게까지 그의 끝에 도달해 목을 분지르는 것 같은 분노를 절절하게 전달한다.

언뜻 재판과 하녀 메리의 배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고뇌, 마을 여자 두사람과 같이 수레를 타고 셋이 교수형장을 향하는 존 프록터의 모습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을 버려두고 홀로 기도하며 고뇌하고, 유다의 배신을 겪고, 군중의 광기에 의한 재판에 의해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향하는 예수의 그것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얼마나 잔인한가. 인간은 신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존 프록터와 같이 인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인간이기를 포기할때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 이상이 되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댓가는 너무나도 끔찍하다.

아서 밀러는 본인이 피해를 입기도 했던 매카시즘을 비판하기 위해 실재했던 세일럼의 마녀사냥 사건을 차용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영화의 각본 역시 아서 밀러 본인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Zeal & Ardor의 'Devil is Fine'.

원맨 프로젝트이고 블랙 메탈과 흑인 스피리추얼, 흑인 노동요를 믹스한 음반이다.

흑인 노예제도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늘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 흑인 노예들이 왜 노예주의 신을 자신들의 신으로 받아들였는가하는 점이다. 이것도 스톡홀름 신드롬의 일종인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프로젝트를 만든 리더인 Manuel Gagneux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흑인 노예들이 하느님이 아닌 사탄을 받아들였다면 어떤 음악이 탄생했을까?'라고.

아무튼, 블랙 메탈에 불경한 가사로 씌어진 흑인 영가 멜로디를 섞어서 나온 결과물은 굉장히 기묘하고 지금껏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바로, 헤비니스 록의 하나의 지향점이었던 사악함. 그런데, 사악함은 이미 수없이 많은 헤비니스 뮤지션들이 거의 교복을 입듯 자주 두르던 이미지이지 아닌가, 그게 뭐 대수일까? 그러나 이 앨범이 기존의 다른 사악한 헤비니스 음악과  다른 점은, 사악함에 하나의 층위를 더했다는 점이다.

이 앨범에서 사탄을 찬양하는 영가의 외침은 나에게는 크루서블의 존 프록터의 신을 부정하는 것과 유사하게 들린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주인의 허락없이 다른 노예에게 사랑을 느끼고 나눈 것을 주인에게 발각된 한 노예가, 밤새 채찍과 매질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 나무에 매달린 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긴 밤을 지샌 새벽의 어스름에, 그러니까 동이 트기 전 곧 그의 숨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가 주인들의 신인 여호와에게 어떤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차라리 저주를 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주인들의 신을 모독하지 않았을까? 그게 더 인간적인 행동이 아닐까? 나라면 그리하였을 것이다. 

나에게 이 앨범의 가사들은 이런 맥락에서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존 프록터가 신은 죽어버렸다고 말하는 순간과 같은, 그런 극한의 분노와 체념 끝에 나오는 사악하고 불경한 가사들은 이전에 어떤 헤비니스 록이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에 다다른다. 이제 사악함은 인간이 너무나 인간다워서 다다르게 되는 곳이라는 층위를 더 한다.

그리하여 이 앨범에서, 인간에게 인간 이상일 것을 요구하는 잔인한 너희들의 신은 부정된다.


"...Nobody gonna show you the way now
Nobody gonna hold your hand, no
Nobody gonna show you the way now
Devil is fine

Nobody gonna show you the way now
Nobody gonna hold your hand, no
Nobody gonna lead you the way now
The devil is fine..."

Zeal & Ardor의 "Devil is Fine" 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