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esun 2024. 7. 18. 16:47

1.
채텀 제도는 뉴질랜드 동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섬들을 말한다. 채텀 제도는 1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큰 섬인 채텀섬과 두 번째로 큰 섬인 피트섬 그리고 그 외의 작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채텀섬의 원주민은 평화를 사랑했고, 그들이 사랑한 평화로 인해 철저하게 멸종한 모리오리족이다. 채텀이란 이름은 최초로 이 섬을 발견한 영국의 선박 이름인 채텀에서 비롯되었다. 그 배의 이름은 영국 어느 귀족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를 아오테아로아-길고 하얀 구름이란 의미-, 채텀을 레코후-안개 낀 태양이란 의미-로 불렀다.

마오리족의 부족간 다툼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잔인했다. 전쟁으로 이긴 부족은 상대 부족을 노예화하고, 심지어 그들의 살을 먹었다. 마오리들은 식인을 통해 상대의 힘인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강한 상대의 살을 먹는 행위를 통해, 상대의 마나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원시적 믿음. 그리고 그들은 적들의 머리통을 미라로 만들어 보관했다. 승리의 징표.

1642년 12월, 두 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네덜란드 선단-선장의 이름은 아벨 타스만이다. 태즈메이니아라는 지명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마오리족과 조우한다. 첫날, 아벨의 선단은 식수를 찾기 위해 선원들을 보트에 태워 섬으로 보냈다. 식수를 발견한 선원들은 곧 배로 복귀했다. 당시 그의 배가 정박했던 곳은 마오리족의 일족인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의 영역이었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농작물인 고구마 경작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경작지에 접근하는 외부인을 발견한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그날 밤 와카라고 부르는 카누 두 대에 나눠 타고  아벨의 선단으로 접근했다.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 전사들은 선단을 향해 나팔을 불며 경계경보를 울렸다. 아벨의 선단은 그 나팔소리에 트럼펫 연주로 대응했고, 와카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여 위협을 가했다.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의 전사들은 천둥 같은 대포 소리에 충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와카를 돌려 섬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선단의 두 선박-헤엠스커르크호와 제헤엔호-사이를 선원들이 보트로 오가며 짐을 옮기고 있을 때, 해안에서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 11명이 와카 2대에 나눠 타고 다가왔다. 두 선박 사이를 왕래하던 네덜란드 보트가 그중 하나의 와카와 충돌했고, 응아티 투마타코키리족 전사들은 보트를 습격하여 네덜란드 선원 4명을 창과 몽둥이로 죽이고 살을 베어내 먹었다. 선단은 총으로 대응했고 응아티 투마타코키리 전사 몇 명이 죽게 된다. 아벨의 선단은 정박했던 만을 ‘살인자의 만’이라고 명명하고 그곳을 서둘러 떠나고 만다.

모리오리족은 1500년경 아오테아로아를 떠나 레코후에 정착한 종족이다. 이들은 레코후에 정착한 후 여러 소부족으로 갈라져 섬 곳곳에 정착했고, 부족간의 충돌이 벌어지면 마오리적인 방법, 즉 식인과 살육의 전쟁으로 해결했다. 정착 초기에는 아직 부족간의 영토가 불분명해서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섬 곳곳에는 남편과 자식을 잃은 여자의 울음소리와 노예로 잡혀간 남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계속되었다. 어느날 밤 라우루 부족과 휘테이나 부족간의 잔인한 전투가 끝나고 섬의 모든 부족장들은 고통을 종식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섬의 조각가이자 존경받는 하마타족의 족장 누누쿠 웨누아를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누누쿠는 전쟁, 살인, 식인을 금지하는 누누쿠법을 제안한다. 고통에 지친 모든 부족들이 누누쿠법에 동의했고, 레코후에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과 살육의 전통이 평화와 환영의 전통으로 바뀌었고, 누누쿠법은 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신앙이 되어갔다.

모리오리들은 평화에 중독되었다. 평화주의 원칙은 거스를 수 없는 신성한 법이 되었다. 레코후의 날씨는 아오테아로아보다 추워서 농사에는 잘 맞지 않았지만, 과일과 생선과 새를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풍족했다. 모리오리들은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며 레코후 곳곳에서 번성해 갔다. 누누쿠법을 지킨 지 200여 년이 흘러, 1791년 최초로 이 섬을 발견한 영국의 측량선 채텀호가 영국령을 선포하며 영국국기를 게양했다. 모리오리들은 환영의 뜻으로 이 외부인들을 향해 나팔을 불며 다가갔으나, 온몸에 문신을 한 덩치 큰 황색인들을 보고 놀란 영국인들은 머스킷을 발사해 위협한다. 이 과정에서 모리오리 남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죽고만다. 그러나 모리오리 사람들은 누누쿠법에 따라 반격은커녕,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방문객 환영의식을 해주었다. 이렇듯 이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평화를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오테아로아의 마오리들은 여전히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오히려 유럽에서온 선원들과 교류하며 머스킷까지 손에 쥐게 되자, 부족 간의 전쟁은 더 빠르고 더 잔인해졌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땅을 잃고 고향을 떠난 마오리의 두 부족 응아티 무퉁가족과 응아티 타마족은 뉴질랜드 북섬의 해안에 임시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유럽 선원들에게 모리오리족이 사는 동쪽의 작은 섬 레코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사람들은 평화롭고, 사냥감이 풍족한 낙원 같은 곳. 1835년 11월, 마오리 전사 500명이 유럽인들에게 배와 총을 빌려 니콜슨 항에서 채텀 제도로 향한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환영의 뜻을 보이는 모리오리족들 가운데 어린 소녀를 잡아 근처 나무에 목을 매다는 것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곧이어 총과 도끼를 든 마오리들은 모리오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마오리들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모리오리 마을로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붙잡아 해변의 나무에 산채로 매달았다. 배고픔과 두려움의 끔찍한 비명이 해변에서 계속되었다. 모리오리 부족들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모리오리 1,000여명이 모였다. 젊은 모리오리들은 우리의 숫자가 더 많으니 맞서 싸우자고 했지만, 늙은 원로들은 성스러운 누누쿠법을 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들과 전쟁을 하기 위해 모리오리들이 모였다고 오해한 마오리들은 회의장소에 난입하여 회의 중인 모리오리들을 사냥했다. 한 달 뒤인 12월, 마오리족 후발대 400명이 채텀에 추가로 도착한다. 이제 모리오리는 마오리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했고, 마오리들은 채텀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선언한다. 모리오리어는 금지되었고, 그들의 성지는 마오리들의 배설물로 모독된다. 심지어 모리오리들은 결혼과 출산조차 금지되었다. 

마오리족의 침략 당시 채텀에는 모리오리들 약 1,600여명이 살고 있었는데, 1863년 공식적으로 뉴질랜드 법원에 의해 노예상태에서 해방될 때까지 1,561명의 모리오리가 죽었다. 전쟁과 살육 그리고 마오리들이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그들의 몸에 지니고 온 바이러스들로 인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순수 모리오리는 고작 10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1933년, 마지막 순혈 모리오리인 토미 솔로몬이 49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순혈 모리오리족은 세상에서 사라지게된다. 2018년 인구조사결과 부계 또는 모계가 모리오리인 혈통인 사람들은 996명으로 집계되었다.


2.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이란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버리는 물건들도 나름의 탄생과 죽음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삶.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한 사물의 아레떼를 실현하기 위한 그들의 삶들. 곧 버릴 순간이 온 짧아진 연필, 한때 몸에 잘 맞아 즐겨 입었지만 몇 년째 옷장 구석에서 꺼내 입지 않은 옷가지, 다 피우고 버려지는 담배꽁초, 즐겁고 슬픈 기억이 어려있는 색 바랜 시트의 중고 자동차에도 삶은 존재한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것들의 수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거기에 묻어있는 인간의 추억과 삶과 역사. 그리고 여기 한 척의 배에 관한 이야기.

당시 나는 뉴질랜드에 한달 정도 머무르고 있었다. 2월의 어느 날, 휴일을 맞아 뉴질랜드 남섬의 동쪽으로 8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채텀 제도로 떠났다. 목적은 채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피트섬 무인도 체험. 채텀에 도착한 첫날 밤, 나는 호텔에서 만난 뉴질랜드 여성에게 우연히 채텀의 한 항구에 난파된 채 버려져있는 한 척의 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채텀 제도는 1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그중 채텀이 제일 크고, 채텀섬 남쪽의 피트섬이 그다음이다. 채텀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면, 채텀은 약간 뚱뚱한 알파벳 소문자 t와 비슷했다. 다만 세로획의 삐침이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휘어진 t. 내가 머문 호텔은 채텀섬의 서쪽 해안 중 t의 가로획과 방금 말한 왼쪽으로 삐친 세로획이 이루고 있는 만-페트레만이라고 한다-의 남쪽 해안에 있었다. 나는 저녁 식사 후 해안의 비치체어에 길게 몸을 펴고 해가 저무는 페트레만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해가 넘어간 뒤 사라져 가는 석양이 건너편 만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 옆 벤치에는 폴리네시아 혼혈인 듯한 젊은 여성이 역시 맥주를 마시며 페트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날씨가 좋으면,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건너편에 있는 항구가 보일거에요. 항구 이름은 헛이에요. 좀 더 날씨가 좋고 당신이 충분히 눈이 좋다면, 거기 기울어진 채 난파한 배도 한 척 보일지 몰라요.

나는 처음에 그녀가 그녀의 일행에게 말하는 줄 알았지만, 곧 주변에는 나와 그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반가워요, 저는 오클랜드에서 온 앰버라고 해요. 갑자기 말을 걸었네요. 혼자 오셨나요?. 나는 웃으며 네,라고 대답하고 내 이름을 말해주며 인사했다. 약간 어두운 피부와 검고 숱 많은 긴 머리카락에 밝고 쾌활한 미소가 그녀의 인상을 시원하고 건강해 보이게 했다. 그녀는 웃음 지으며 손가락으로 만 건너편 해안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해안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지만, 이미 어둑해진 해안은 희미할 뿐이었다.

  저는 몇 년째 시간이 나는대로 그 배를 보러 이곳에 와요. 그녀는 손에 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가 없군요.
  그러네요. 내일은 헛으로 가볼까 해요. 배가 누워있는 곳. 포트 헛.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매 년 보러오다니, 배가 꽤 오래 그곳에 있었나 보네요.
  네. 1968년도부터요. 
  1968년이라니. 그렇게 오래요?
  네, 나름 유명한 배에요. 배의 역사가 파란만장하기도 했고. 관광객들에게 뉴질랜드 역사를 설명하는 유물로 소개되기도 하고요.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인연도 있고.
  배 나이가 얼마나 된거죠?
  49년 정도…그러니까 1968년 생을 마칠 때의 선령이요. 1919년에 건조되었으니까.
  나는 항구 근처에 비스듬히 누워 세월에 낡아가는 선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번 보고 싶군요.
  같이 가도 괜찮아요. 저도 혼자고, 혹시 다른 일정이 없으시다면.
  일정은 따로 없습니다. 여행에서 적당히 생기는 의외의 일은 기분 좋죠. 같이 가도 방해되지 않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이번에는 말동무가 좀 있었으면 했는데. 좋아요. 내일 같이 가요.
  그녀는 웃으며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맥주를 사죠.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그녀와 나의 맥주를 두 병 주문했다.
  고마워요. 토마스 커렐이에요.
  네?
  그 배의 이름이요. 난파한 배. 내일 보러갈.
  아,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배를 자주 보러가시는 건가요?
  글쎄요, 저희 집안 내력과 조금 닿아있기도 하구요. 그냥… 처음 보는 순간 왜인지 마음이 쓰였어요. 처음 보고 돌아간 뒤 얼마 안 가 꿈까지 꾸었는걸요.  저도 궁금해서 다음 해에 다시 찾아와 봤죠. 확실히 내 마음의 깊은 곳 어딘가를 그 배가 건드리는 것 같아요. 아무도 보여주기 싫은 깊은 곳을. 그런데 배에 관해 호기심이 생기시나 봐요?
  그럼요. 난파한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는 죽은 배와 그 배에 이끌려 이 곳까지 오는 아름다운 여성. 궁금합니다.
  그녀는 좋은 시도네요,라고 하며 미소를 짓는다.
  배의 고향은 영국이에요. 1919년에 만들어진. 당시에는 이름이 달랐어요. 토마스 커렐이 아니라 엔리코라고 불렸고, 증기선이었죠. 트롤 어업용. 저인망 그물로 대구나 청어를 북대서양에서 잡던 배. 잉글랜드 북부의 작은 어촌인 워킹 턴의 R. 윌리엄슨 앤스 선 사에서 제작했어요. 1차 대전이 막 끝났던 시기였죠. 그런데, 채텀의 역사는 조금 알고 계신가요?
  그 배에 관해 빠삭하시군요. 네, 모리오리족에 관한 역사 말하시는 거라면 조금 읽어두었어요.
  워낙 오래 보다 보니 배에 관해 이것저것 알게된 것들이 좀 있어서... 그럼 마오리족의 정복으로 멸종한 역사. 맹목적인 믿음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임을 알려주는 그 이야기도 알고 계시는군요?
  네. 처음 오는 곳이다 보니 저도 이것저것. 사전지식 삼아.
  성실한 타입이시네요. 그녀는 웃었다.
  모리오리족이 공식적으로 노예에서 벗어나 이 섬의 원주민으로 인정받은 게 1963년이에요. 그 바로 다음 해 1월 1일, 새해 첫 날 영국에서 앨버트 샌포드란 어부가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에 도착해요. 지금 제가 배에 관해 얘기하려는데, 괜찮나요? 쉬시는 걸 방해할까 봐.
  천만에요, 저는 이야기 듣는 걸 무지 좋아합니다. 
  좋아요, 그럼. 아무 부담없이, 저는 이야기하길 무지 좋아하니까, 이야기할게요.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윌리엄이라는 사람은 뉴질랜드에서 배를 하나 사서 생선을 잡아서 팔다, 훈제도미 사업으로 성공해서 큰돈을 벌고,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수산회사를 설립해요. 샌포드사.
  나는 뉴질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샌포드사의 이름을 몇 번이고 듣고 본 기억이 났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태평양이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바다라고 생각했어요. 배를 빌려 낚시해보니, 도미가 잔뜩 잡혔던 거죠. 그는 곧바로 범선을 하나 구입해서 생선을 잡아 근처 어시장 상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대박이 나요. 그가 자신의 배에 훈제실을 설치해서, 갓 잡은 도미를 바로 선상에서 훈제한 뒤, 항구에 도착하면 보트로 부두까지 훈제 도미를 실어 날라 그 자리에서 팔던 게 입소문을 탔죠. 갓 잡은 신선한 훈제 도미로. 곧 그는 퀸스트리트 부두에서 가장 유명한 판매상이 되었죠. 돈을 많이 벌었어요. 십 년 정도 지나니 사업도 많이 커졌죠. 자신 명의의 생선가게도 갖게 되었고, 직접 배를 타기보다는 선원을 고용하거나, 다른 선주의 생선을 구매하게 되었고, 얼음공장을 만들어 수산물 가공사업에 몰두하게 돼요. 그때 즈음 윌리엄은 유럽에서 유행하던 트롤어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왕창 잡을 수 있으니까.
  성공했군요.
  성공했지요. 막상 트롤 어선을 한 척 구입해서 운영해보니, 너무 짭짤한 거예요. 그는 아예 자신의 사업을 유한회사로 전환해 샌포드사를 설립해요. 당신이 이곳에서 먹은 수산물 가운데 샌포드사를 거치지 않은 건 찾기 힘들 거예요. 현재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큰 수산회사예요.
  그러고 보니, 트레일러에 샌포드라고 적힌 걸 몇 번 본 거 같아요.
  뉴질랜드 도로에서 샌포드사의 트럭을 못보기가 더 힘들죠. 아무튼 당시 윌리엄은 트롤어선을 더 구입하고 싶었는데, 당시 뉴질랜드에는 아직 트롤어선이 많지 않았죠.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영국에 보내 쓸만한 트롤어선을 찾게 해요.
  드디어 토마스 커렐호가 등장하는군요.
  맞아요. 1921년 12월, 엔리코는 토마스 커렐로 이름을 변경하고 샌포드사에 팔려서 태평양으로 향하게 되요. 여기 오는데 석 달이 걸렸죠. 토마스는 굉장했다고 해요. 아직 젊은 배인 데다가, 최신 어업 기계를 갖추었으니, 태평양을 만나 그 능력을 최고로 발휘했다고 해요. 아마, 토마스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거예요. 날씨는 따듯하고, 전쟁은 끝나 평화롭고, 생선을 잔뜩 잡을 수 있었고. 
  사람으로 치면, 영국에서 학교를 마치고, 뉴질랜드에 취직해서 능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네요.
  아, 정말 딱 맞는 비유네요, 어쩜.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졌죠...군대를 가야 했죠 우리 토마스도. 그녀는 둘 만이 아는 비밀을 나누는 은밀한 눈웃음과 함께 ‘군대’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당시 뉴질랜드 상선에 대한 징집명령이 떨어졌어요. 태평양 전쟁은 아직 일어나기 전이지만, 그래도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연합군의 물자 수송 같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회사의 선박들이 차출되었죠. 토마스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토마스는 징집명령 당시 조업 중이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고기를 잡고 있었죠. 당시 토마스의 선령은 이미 20년이 넘었고, 무선 통신기도 없었거든요. 세월이 흘러 이제 조금씩 구식이 되어가던 때였죠. 어쨌든 입항하자마자 잡은 생선을 하역하고 데븐포트의 해군기지로 “입대”해요. 토마스 같은 트롤 어선들은 개조를 거쳐 기뢰제거선으로 활용되었어요. 애초에 트롤선은, 조금만 개조하면 바닷길 여기저기 설치된 기뢰를 해소하기에 안성맞춤이었거든요. 기뢰를 요격하여 폭파시키기 위한 주포도 설치되었고요. 무전기도 새로 달았죠.
  점점 인간의 인생같네요. 전쟁, 징집, 훈련, 무기지급에 참전까지.
  그렇죠. 당신 덕분에 정말 토마스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분이 드네요... 기뢰를 발견해서 제거하는 게 토마스의 임무였죠. 당시 뉴질랜드 근방에는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가 많아서, 수송선이나 여객선 피해가 종종 있었거든요. 아무튼 전쟁이 끝나자 토마스도 전역하게 돼요. 기뢰제거를 위한 무장과 설비를 떼어내고 다시 어선으로 개조를 거쳐 트롤어업을 이어갔어요. 하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선체도 많이 낡았고, 잦은 개조로 이제는 청년이라기보다는 장년의 느낌이 나는 어선이 되었죠. 토마스는 이제 구식이 되었어요. 전후에는 석탄으로 운항하는 증기엔진보다 연료도 저렴하고, 인력도 덜 드는 디젤엔진이 더 선호되던 시대였죠. 유지비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토마스는 묵묵히 조업을 수행했어요. 하지만 샌포드사는 토마스를 7천 파운드에 웰링턴 어부협동조합에 팔아넘겨요. 1952년, 토마스의 나이 33세였어요. 
  뭔가 안쓰럽네요. 사람은 아니지만, 쓸모가 없어지면 내보낸다는게. 사실 사람 사는 곳도 그렇긴 하죠.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이상한 걸까요.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느끼니까. 그리고 세상이 그나마 살만한 것 역시 그런 사람들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가끔 해요.
  그녀는 밤바다를 쳐다보며 잔을 비웠다.
  그럼, 아까 1968년에 포트 헛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했으니... 토마스는 팔려간 뒤에 도 16년 정도 더 어선으로 활동을 한 거네요.
  네. 웰링턴 어부협동조합은 토마스를 인수하고 몇 년 뒤 석탄 엔진을 디젤엔진으로 교체했어요. 디젤 엔진은 훨씩 무거워요. 엔진만 교체해서는 안되고, 늘어난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선체도 새로운 무게에 따라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개조해야 했어요. 그리고, 몇 년 뒤 토마스는 다시 한번 매물로 웰링턴 트롤러사에 매각돼요.
  또 한번.
  네. 심지어 수술도 한 번 더하게 되죠. 웰링턴 트롤러사에서 트롤선으로 조업을 이어가다, 1966년 냉동선으로 개조하게 돼요. 마지막 개조를 위해 토마스는 헛으로 옮겨져요. 채텀의 랍스터를 잡아 뉴질랜드 본토로 수송하는 동안 냉동할 수 있도록 냉동시설을 얹었죠. 이미 선령이 50세에 가까워진 나이에 지나치게 큰 수술이었죠. 실제로, 개조 이후에 때때로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고... 그러다 옆의 배와 충돌하기도 하고..
  저런... 아까는 반농담이었지만, 지금은 진짜 안쓰럽네요.
  랍스터를 실어나르고 채텀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토마스는 항로를 불안하게 벗어나면서, 선체가 기울어지기 시작했어요. 선장은 토마스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았죠. 당시 수석 엔지니어였던 지미는 선장에게 가까운 헛으로 빨리 이동해서 정박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토마스는 기울어진 채 자신이 낼수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헛을 향해 마지막 항해를 하게 되고, 헛에 도착한 후 선원들은 토마스를 내버려 둔 채 구명선을 타고 하선하게 되죠. 그리고 토마스는 거기서 기울어진 채 생을 마감하게 돼요. 1968년에.

  그녀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밤의 만을 가득채운 바닷물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잠시 말없이 건너편 어둠 어딘가에 조용히 누워있을 토마스 커렐호를 생각했다. 밤바다 멀리 어선의 불빛들이 구슬목걸이처럼 떠있었다. 달은 납작하게 눌려 수많은 별을 뒤로한 채 하늘에 떠있었다. 고요했다.
  그런데, 당신 집안과는 어떤 관계인거죠?
  아, 그녀는 잊었던 일이 생각난 사람 특유의 몸짓으로 표정을 추슬렀다.
  토마스의 마지막 냉동선 시절 수석 엔지니어였던 지미..지미 레너햄이 제 아빠예요. 그리고 증조할아버지 이름은 토미 솔로몬인데, 혹시 저희 증조할아버지 이름을 들어보셨을까요?
  토미 솔로몬? 아, 그 최후의 순혈 모리오리족 말씀인가요? 그분이 당신 증조할아버지였나요?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네, 맞아요. 모리오리의 후손들은 뉴질랜드 본섬으로 가서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분들이 많았는데, 저희 할아버지도 오클랜드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시다가, 그곳에 정착했어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를 낳았죠. 아버지는 샌포드사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토마스 커렐을 영국에서 사 오기 위해 파견되었던 샌포드 직원 가운데 하나였어요. 퇴직 후에는 자신의 배로 직접 생선을 잡기도 하시고 다른 배의 선원으로 일하시기도 하셨죠. 그러다가 웰링턴 트롤링사의 토마스를 다시 마주친 거예요. 늙고 병든 토마스를 보시면서, 아빠는 자신과 같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웰링턴 트롤링사에 토마스를 잘 안다고 하면서 수석엔지니어를 자처하셨죠. 실제로, 냉동선 개조 후 다루기 쉽지 않았던 토마스가 골치였는데, 회사로서도 반가웠겠죠. 아빠는 토마스를 정말 좋아하셨어요.
  이제 조금 알겠군요, 가끔 이곳에 오시는 이유를. 
  네, 저는 아빠가 아꼈던 토마스를 보러 와요.
  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지내시나요?
  아빠는 그 후 다른 배를 타고 항해 중 실종되셨어요. 딱히 아빠가 그립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저는 종종 이 곳에 와서 토마스를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생기곤 해요. 
  우린 잠시 말 없이 맥주를 마셨다. 밤이 깊었다. 우리는 잔을 비우고 아침에 이곳에서 만나 헛으로 가기로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밤인사를 나누고 각자 숙소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머리를 묶고 선그래스를 머리 위로 올려 쓰고 반바지에  샌들과 하와이안셔츠 차림으로 어제 이야기를 나눈 곳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차를 빌려두었다고 했다. 그녀와 함께 차를 타고 페트레만을 빙 둘러싼 해안도로를 타고 헛으로 향한다. 관광지 아침 특유의 한가한 풍경이 지나간다.  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항구가 보이자 그녀가 차를 세웠고, 그녀와 나는 차에서 내려 해변으로 걸어갔다.

  거기, 한때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비던 검붉은 철 덩어리가 배의 모양을 하고 비스듬히 바다에 누워있었다. 밀물 때 배는 완전히 바닷물에 잠겨있다가, 썰물이 되면 붉게 녹슨 몸을 드러냈다. 좌현 앞부분에 하얀색 페인트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THOMAS CURRELL이라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 크게 WN122라는 번호가 쓰여있었다. 그것은 마치 묘비명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