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위에뜬기분이었어

버펄로 '96_03. 빌리 브라운

palesun 2024. 12. 10. 14:44

  12월 아침의 교도소는 몹시 추웠다. 빌리는 이미 잠에서 깼지만 이불로 온몸을 돌돌 감싸 안고 잔뜩 웅크린 채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기상을 알리는 교도관의 고함과 철제 구조물들이 내는 소리가 아직 잠이 덜 깬 그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다. 그는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올려 들려오는 소리를 틀어막았다. 5년 동안 들었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은 지긋지긋한 쇳소리.

  빌리는 눈을 감은 채 간밤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스콧 우드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꿈.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종종 꾸곤 했던 그 꿈이 출소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근래에는 너무 선명해서 그건 마치 꿈이 아니라 실제로 겪었던 일의 회상 같았다. 총구를 바라보는 스콧의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 총과 손바닥 사이에서 느껴지는 땀의 끈적함, 무방비하게 노출된 방아쇠의 유혹적인 촉감 같은 세세한 부분들이 마치 실제처럼 생생했다. 꿈은 이곳에서 보낸 세월을 보상받고 세상에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스콧 우드를 죽일 수밖에 없지 않냐며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는 듯했다.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내가 미쳐버리거나 목을 매달지 않은 건 어쩌면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이라고 생각했다.

  1991년. 버펄로 빌스 대 뉴욕 자이언츠의 슈퍼볼 25. 경기 종료를 8초 남긴 상황에서 버펄로 빌스는 뉴욕 자이언츠에 1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버펄로 빌스의 마지막 키커인 스콧 우드가 47야드 필드골을 시도한다. 버펄로 빌스와 뉴욕 자이언츠의 전사들이 공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있다. 스콧은 공을 놓고 뒷걸음을 걸으며 공과 골대와 스크럼을 번갈아 바라본다. 스크럼을  짠 양 팀 선수들의 어깨와 등 그리고 스콧의 얼굴에 베일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버펄로 워필드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4만여 관중들의 함성이 일순간 고요해진다. 스콧이 골대를 향해 공을 찬다. 날아오른 공은 골대 오른쪽 1피트 옆을 빗겨 날아간다. 19-20. 경기 종료. 버펄로 워필드 스타디움의 버펄로 빌스 팬들은 스콧을 향해 미친 듯이 야유를 퍼부었다. 자신이 찬 공이 골대 오른쪽으로 빗나가는 걸 바라보던 스콧 우드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마도 좆됐네, 였겠지.

  같은 시각 빌리는 버펄로 빌스 점퍼를 입고 친구 딸쟁이 집에서 숨죽이며 슈퍼볼 25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는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 만 달러를 버펄로 빌스에 몽땅 걸어두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스콧이 찬 공이 골대 오른쪽을 빗겨 날아가는 걸 바라본 빌리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좆됐네.

  스콧은 지난 6년간 버펄로 빌스의 가장 믿음직한 키커이자 스타플레이어였다. 그럼에도 슈퍼볼 25가 끝난 다음 날 버펄로 지역신문들은 하나같이 그에 대해 악의에 가득 찬 기사들을 실었다. 몇몇 신문은 동네 선술집에서 안주로 나눌 법한 뜬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 기사로 내보냈다. 스콧이 도박사들에게 돈을 받고 일부러 똥볼을 찼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다. 필드골 성공률이 70%가 넘는 스콧이 슈퍼볼의 결정적 순간에 실수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1점 차로 슈퍼볼 승리를 놓친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열광적인 버펄로 빌스의 팬들에게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문제는 빌리가 그 소문을 믿었다는 데 있다. 개새끼. 똥볼과 함께 내 돈과 소중한 5년을 골대 옆으로 날려 보낸 개자식. 돈에 눈이 멀어 팀과 팬들을 저버린 쓰레기. 조금만 기다려라. 곧 나갈 테니. 쾅 쾅 철문을 두드리며 교도관들이 기상을 외치고 있다. 빌리는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스콧을 향해 저주의 말을 되뇌었다. 기상을 외치는 교도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인류가 아직 동굴에 살던 시절 인간에게 세상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고통을 달래왔다. 고통에는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러한 오랜 버릇이 버펄로 빌스의 몇몇 팬들에게도, 그리고 빌리에게도 반복되었다. 스콧이 뒷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었다. 그것은 빌리가 헛소문을 듣고 키워낸 망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곳에서 보낸 무의미한 5년어치의 분노를 어디론가 쏟아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생긴 5년의 공백에 복수의 망상을 채워 넣었다. 그에게 스콧 우드는 뒷돈을 받고 일부러 똥볼을 찬 쓰레기여야만 했다.

  빌리는 그 이후 풋볼은 전혀 보지 않았다. 그는 수감 초기에 자신이 한탕을 노리고 돈을 걸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돈에 명예를 팔아넘긴 스콧 우드, 돈으로 그를 매수한 썩어죽을 도박쟁이들, 한심한 공놀이일 뿐인 좆같은 풋볼 리그, 돈이 그렇게 사용되도록 내버려 둔 세상과 인간과 버펄로 빌즈와 뉴욕 주 정부와 연방정부와 세계와 하느님 모두가 좆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러한 망상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마다 다다르게 되는 막다른 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크게 쓰여 있었다. 씨발, 씨발, 씨발.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아서 뾰족한 기억들을 둥글게 다듬는다. 빌리의 자기 연민과 복수 망상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인생에 나타난 싱크홀에 자신에 대한 연민과 버펄로의 가룟 유다, 스콧 우드에 대한 복수심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복역하고 첫 1년 정도는 실제로 거기에 생생한 복수심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노와 망상은 점점 식어갔다.

  언젠가 자기 부인과 바람피운 놈을 찾아내 총으로 쏴 죽이고 시체를 열한 조각으로 토막 내 무기징역을 받은 한 노인이 빌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는 여기서 20년을 넘게 지내면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날 내가 저지른 일을 생각해본다네. 그러니까 젊은 친구, 자네한테 해주고픈 말은, 자네는 총구를 그놈이 아닌 자네 머리에 겨누고 싶은 건지도 몰라. 

  물론 빌리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 역시 스스로 자신의 망상이 어처구니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교도소에서 지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풋볼이고 나발이고 출소만 하면 모든 걸 잊고 새 인생을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끊어진 선을 다시 이어서 긋고 싶은 생각이 마음 속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휴게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웃는 표정으로 풋볼 경기를 해설하고 있는 은퇴한 스콧 우드를 본 이후, 그는 다시 주변 동료 수감자들에게 자신의 5년을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스콧 우드로부터 총알로 확실하게 되돌려 받을 예정이라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그는 버릇처럼 말했다. 좆같은 세상. 좆같은 버펄로. 좆같은 풋볼. 좆같은 스콧 우드.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