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펄로 '96_02. 레일라
쉬는 날이라 오전 내내 늦잠을 자던 레일라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무시하려 했지만 벨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렸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빠져나와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10시 30분. 그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수화기를 들고 늦잠에 잠긴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레일라 씨 댁인가요? 여기는 ‘미래의 얼굴’ 모델 에이전시에요.
수화기 너머 활기 넘치는 여자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래의 얼굴’ 모델 에이전시는 그녀가 프로필을 등록해 둔 여러 모델 에이전시 가운데 하나였다.
네, 맞아요. 제가 레일라에요…. 촬영 의뢰가 들어왔나요?
아, 의뢰는 맞는데 촬영은 아니고요. 내년 초 공연하는 연극 배우 오디션 소식이 들어와서 연락드렸어요. 규모가 큰 건 아니고 소극장 공연인데, 일단 2회 정도 공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디션 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레일라는 오디션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아직 반쯤 잠든 그녀의 머리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오디션이라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레일라 씨? 듣고 계신가요?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물론이죠, 라는 말을 메마른 목 안쪽에서 가까스로 끌어올려 대답했다.
레일라는 레스토랑 두 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모델 에이전시 여러 곳에 자신의 프로필도 등록해 두었다. 에이전시에서는 가끔 그녀와 어울리는 촬영을 의뢰했다. 대부분 그녀의 외모와 몸매를 활용할 수 있는 성인 클럽이나 카지노, 여성용 속옷 광고 등이었다. 광고 촬영이 아닌 제의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배우가 되기를 꿈꾸어 왔기 때문에, 꿈을 향한 첫걸음이 될지도 모를 오디션 제의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든 채 생각했다. 드디어.
레일라는 부모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레일라 주위에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 뭔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갓난아기였을 때 보육원에 버려졌다. 상쾌한 공기가 뉴욕 주립 아동보호소 건물을 기분 좋게 감싸 안았던 6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늘 하던 대로 청소를 하러 보호소 문을 연 원장 수녀는 문 앞에서 희끄무레한 새벽빛을 받고 있던 바구니 하나를 발견했다. 수녀는 바구니 안에서 강보에 싸여있는 작고 연약한 아기와 접어둔 쪽지를 발견했다. 엽서에는 ‘죄송합니다, 아이의 이름은 레일라입니다. 아이 아빠와는 연락이 닿질 않고 저 역시 아기를 돌볼 여유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모마리아의 자비를 빌며’라고 쓰여 있었다.
엽서에는 아기의 이름 말고는 어떤 정보도 없었다. 원장은 보육원에 버려지는 아기들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에 바구니에 담긴 아기를 보고도 담담했다. 하지만 이 아기는 좀 달랐다. 아기가 자신을 마치 늘 보던 익숙한 얼굴인 양 아기답지 않은 또렷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환하게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원장은 조금 놀라웠다.
레일라는 자신의 어머니를 확인하기 위한 유일한 증거이자, 어쩌면 유일한 유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를 그 쪽지를 지금도 앨범 구석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레일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그녀의 엄마나 아빠에게 물려받았을 터인,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미소를 타고난 아이였다. 꼬마 레일라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 원장 수녀님을 놀라게 했던 그 미소를 자주 짓곤 했다. 보육원에선 모든 걸 다른 아이들과 나눠야만 했고,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런 환경 속에서 타고난 미소 뒤쪽으로 자신의 감정들을 쌓아놓곤 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던 꼬마는 자연스레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조숙한 아이가 되었다.
구김살 한 점 없이 환한 미소를 타고난 꼬마 레일라는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의젓한 소녀가 되었다. 소녀 레일라는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는 미소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아직 어린 소녀가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웃을 수 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렇게 소녀 레일라의 미소에는 꼬마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서글픔이 약간 섞여들어, 그녀의 미소를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레일라는 여러 감정을 내면에 쌓아두곤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그제야 쏟아냈어야 했던 말들이 깨어났다. 밤은 그런 말들이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자는 동안 말들은 깨어나 악몽이 되었고, 그녀의 잠을 방해하곤 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꿈이란 으레 불쾌하고, 누구나 그런 꿈을 꾸는 줄로만 알았다. 지난밤 꿈속에서 부모님과 추수감사절을 보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또 자신이 낮에 졸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들의 꿈에 시달린다고 하자 자기 손을 마주 잡고 해주시던 수녀님의 기도문을 듣고서야, 그녀는 꿈에도 기분 좋은 종류가 있다는 것과 잦은 악몽이 누구나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레일라는 감정을 감추지만은 않았다. 조금씩 신중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면서 그녀를 괴롭히던 악몽도 점차 줄어들었다. 꿈을 꾸지 않는 밤들이 늘었다. 감정을 다루는 방법에 완전히 익숙해질 무렵 그녀에게는 다른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몸,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녀의 가슴이었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동안 그녀의 유전자는 빠르게 가슴 부피를 확장해 나갔다. 또래 소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단체 생활에서 나날이 커지는 가슴을 숨기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짓궂은 남자아이 몇이 그녀의 가슴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줄을 서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은근슬쩍 팔꿈치로 가슴을 건드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시기와 질투어린 시선도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슴만으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게 불편했고, 가슴 때문에 무례한 일을 당하면 화가 났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미소 뒤에 숨겨놓을 수 있었던 감정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이 거대하고 묵직한 두 개의 살덩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녀는 감이 오질 않았다.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시간이 해결해준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시차 때문이다, 라고 고쳐 말할 수 있다. 예민한 사춘기에 그녀를 괴롭히던 큰 가슴은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장점이 될 운명이었지만, 어린 레일라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수녀님이 레일라, 네가 부모님과 헤어져 이곳에 온 게 네 잘못이 아니듯, 네 가슴도 네 잘못이 아니란다. 네 몸을 부정하면서 산다는 건 힘든 일이야. 네 가슴을 네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렴, 이라는 말을 듣고 레일라는 어쩌면 부모님에게는 자기가 불편한 큰 가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큰 가슴을 조금은 덜 미워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미소와 가슴은 레일라의 (말 그대로)커다란 장점이 되었다. 보육원 아이들과 교사들은 모두 그녀의 미소를 칭찬했고, 그녀의 가슴을 흘끔거렸다. 그녀는 보육원을 대표하는 예쁘고 착하고 가슴이 큰 소녀로서 명절에 열리는 행사의 중요한 역할들을 도맡게 되었다. 그 중 연극 무대는 그녀에게 매우 각별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연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세상으로부터 감추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을 만끽했다. 증오와 행복과 기쁨과 절망을 느낄 때마다 마음껏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던 경험들은 그녀에게 무한한 해방감을 주곤 했다. 행사들 가운데 가장 큰 무대는 크리스마스 전날의 ‘후원자의 밤'이었다. 그날은 보육원생들이 가을 내내 준비해 온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녀는 후원자의 밤 연극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남몰래 설레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에서 독립한 레일라는 본격적인 배우수업을 위해 예술전문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그럴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우선 카페나 작은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자신의 몸매를 한껏 부각한 프로필을 뉴욕에 있는 거의 모든 모델 에이전시에 등록해 두었다.
레일라의 미소와 가슴은 사회에서도 먹혔다. 그녀가 내면에서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처리한 뒤 자기 얼굴로 출력하는 환한 미소는 손님을 대하는 서비스업에 잘 맞았다. 그녀의 육중하고 화려한 가슴 역시 성인 전용 클럽이나 여성용 속옷 사진 모델로 꽤 인기가 있었다. 그때쯤 완전히 피어난 그녀의 가슴은 오, 예수님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그녀가 레스토랑에서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거나, 카메라 앞에서 가슴을 부각하는 옷을 입고 대담한 자세를 취할 때면 아무리 까다로운 손님이나 광고주라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 하곤 했다.
레일라는 그렇게 배우의 꿈을 꾸며 예술전문학교 등록금을 차곡차곡 모아갔다. 레스토랑도 좀 더 크고 급여가 나은 곳으로 옮겼다. 광고모델 의뢰도 조금씩 늘어갔다. 수입이 늘어나는 대신 원치 않는 유명세도 치러야 했다. 그녀가 일하는 레스토랑의 손님으로 온 적이 있거나 그녀가 찍은 광고에 반한 남자들이 그녀를 스토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여자인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레일라는 꿈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나아갔다. 그녀의 꿈을 향한 걸음이 마냥 수월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순조로웠다. 적어도 첫 남자친구 게빈을 만나기 전까지는. 게빈은 그녀가 모은 돈을 모조리 약을 사는데 써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