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esun 2025. 3. 21. 00:57

그 길. 지날 때마다 수없이 고개 숙여 바라보던 포석들. 나는 그 길에 덮인 돌들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몸을 구부려 집요하게 발 끝을 쫓았다. 그럴 때면 시간은 숙인 고개 위로 잘도 흘러가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비슷비슷해 보이던 돌들은 조금씩 제각각의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반듯한 네모들은 각자만의 인상으로 끊임없이 내게 다가왔다. 돌들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주며 걷는 한 걸음걸음 밟는 돌덩이 하나하나씩에 하찮은 질투와 엉성한 변명과 애매한 희망과 서러운 다짐들을 새겨두곤 했다. 해가 뜨는 날이면 나타나곤 하던 내 그림자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가지 같았고 거기엔 아무런 기다림도 남아있지 않았다.너는 얼마나 단단하던지. 강철같이 차가운 껍데기를 눈으로 어루만지다 보면 어느새 거기엔 뽀얀 입술의 풀들이 싹을 올려냈다. 나의 시선은 한없이 뾰족해져 갔고 어딘가로부터 온 전언을 손에 들고 껍데기에 베껴 새길 때면 계절을 놓친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길은 모독적이고 외설적인 단어들의 음각으로 가득 찼다. 계절이 차가운 빗물로 홈을 채우며 말들을 읽는 날이면 나는 또 한 개비 더 피워야 하나 아니면 어디론가 가야 하나 허망하게 눈을 들어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더 이상 새길 말도 여백도 사라져 갈 무렵 봄은 갓난아이 뒤꿈치 같은 새볕과 함께 기어코 그 길에도 오고야 말았다. 내가 떨구곤 했던 비늘 같은 초조함을 먹고 자란 잡초들이 웃자라 보란 듯이 나를 비웃던 그 길에 선 어느 날 나는 전에는 모르던 청록색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와 서러운 벌레들이 휘젓는 날갯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말들을 읽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나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그 길을 등질 수 있었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 길에 그렇게 봄이 오고.